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기부문 장려
“차 좀 빼주세요.” 권현우 20살 군 입대를 위해 대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주유소 주유원으로 일했습니다.추운 겨울의 어느 날, 주유소 출구에 차를 대고 있는 남성에게출구에 차를 대면 주유를 마친 차들이 나갈 수 없다고 말을 하자 그 남성이 저의 왼쪽 뺨을 때렸습니다.‘건방진 알바 새끼’가 손님에게 명령을 한다고 하며.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당시에는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채 생기기도 전이었고,저는 주유소 사장님이 해주신 ‘공부해서 성공하면 이런 일 안 당한다’는 말로 위로를 부끄럽게도 받았습니다.15년 동안 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억울함과 슬픔을 글로 풀었습니다.지금의 저는 알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말하고 싶습니다.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저에게,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우리에게.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 울지 말자고.함께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해서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차 좀 빼주세요. 출구에 차를 대시면 차들이 못 나가잖아요,” 추운 겨울의 주유소. 기름 총을 주유기에 다시 꽂고 금방 주유를 마친 손님, 아니 손님의 차에 “안녕히 가세요.”를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내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을까. 굳게 닫힌 창문 안은 보이지 않았다. 추워서 그랬을 것이다. 추워서 창문을 다시 빨리 올렸을 것이다. 그리 고 나는 앞선 문장을 말하며 굳게 닫힌 창문의 차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도로와 주유소 사이에 인도가 있었고, 그 인도는 주유소에 들락날락거리는 차들을 위해 낮춰져 있었다. 그리고 낮아진 인도와 도로에는 ‘주유소 출구’라 적힌 흰 글씨가 크게 보였다. 저 글씨가 보이지 않았을 리 없고, 이곳이 주유소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흰 색 해치백 자동차가 주유소 출구에 차를 대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유를 마친 차가 주유소 출구 앞의 흰 자동차 탓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출구 였고 주유를 마친 차는 다시 도로로 나가야했다. “차 좀 빼주세요. 출구에 차를 대시면 차들이 못 나가잖아요.” 나는 외쳐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가기를 기다리는 차의 손님에게는 ‘나는 지금 당신이 이 주유 소를 나가도록 하는데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고 그리고 또 주유소 출구를 막은 저 흰 차가 혹시 내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 바로 차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줄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이어 발생한 일, 사건, 사고, 실수..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어 발생한 그 어떤 일 덕분에 주유를 마친 차는 나의 노 력을 눈앞에서 생생히 볼 수 있었고, 주유소 출구를 막았던 흰 차는 결국 그 자리에서 30분간 서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흰 차의 차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이 차를 빼 달라 말하는 나 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차는 여전히 주유소 출구를 막아놓은 채였고, 남성은 빠르게 나에 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금방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어디서 건방지게 주유소 알바가 손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이래라 저래라였을 것이다.‘이래라’라는 말 뒤에는 보통 ‘저래라’라는 말이 붙기 마련이니까. ‘저래라’였을 것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래라’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왼쪽 뺨 과 귀를 걸친 부위, 그러니까 정확하게 내 귓방망이를 남성이 자신의 오른 손바닥으로 때려 날 렸기 때문이었다. ‘퍽!’ 짝이 아닌, 퍽.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성은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계속 말하는 듯했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욕이었을 것이고, 욕이 아니었다고 해도 결코 칭찬의 말이거나 사과의 언사는 아니었을 테니까. 내가 따귀를 맞는 소리가 들렸던 것일까, 아니면 주유소 사장님이 항상 따뜻한 사무실 안에서 지켜보시던 CCTV에 내가 휘청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일까. 사장님께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 습이 보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사람을 때려요!” 사장님이 남성에게 따지듯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내가 왜 뺨을 맞아 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만 있었다. 내가 어떤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저 남자는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나는 그 이유를 내 뺨의 얼얼함을 느끼면서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바 로 그때, 내가 뺨을 맞은 이유가 들렸다. “건방지게 알바 새끼가 차를 빼라 마라고 말을 해! 씨발, 건방진 새끼가!” 그렇다. 내가 건방진 알바 새끼였기 때문에 맞은 것이다. 아닌가. 차를 빼라고 말을 했기 때문인 가. 차를 빼라 마라고 하는 이야기는, 알바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파트 주차장에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이 차를 대면 관리 아저씨께서 오셔서 차를 빼라 하실 것이고, 식당 주 차장에 식당 손님이 아닌 사람이 차를 대면 차를 빼라고 식당 주인이 나와서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경비 아저씨나 식당 주인도 뺨을 맞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건방진 알바’였기 때문에 뺨을 맞은 게 확실했다. 경찰이 왔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렸지만, 생업에 계신 부모님 대신 가까운 곳에 서 사업을 하고 있으신 작은아버지께서 부랴부랴 주유소로 찾아오셨다. 경찰은 내게 경위를 물 었다. “왜 건방진 알바 새끼가 되었습니까?”라고는 당연히 묻지 않았고 내가 무슨 말을 저 숭고 한 남성 고객님께 했는지 물었다. “차를 빼라고 했다, 주유소 출구라 차를 대면 다른 차들이 못 나간다고 했다.”라고 말하며 나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작은아버지께서 울지 말라고 말을 계속 내게 해주셨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더 눈물이 났다. 경찰은 나와 남성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전화번호를 묻고 떠났다. 함께 경찰서를 동행 하지도, 남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폭행죄라는 죄가 있는 걸로 아는데 아무도 폭 행죄로 저 남성 고객님을 고소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경찰이 떠나고, 주유소 사장님도 남성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물었고 메모를 해 두는 듯 보였다. 다시 가게로 돌아가셔야 하는 삼촌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위로의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다. “울 지 말고 이제 주유소 알바 그만해.”라고 하시며. 나는 계속 울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잠시 사무실 안에 들어가서 쉬고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나 대신 기름을 넣으러 온 손님들을 응대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다시 사장님이 가게로 돌아 오셨고, 나는 그때까지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건방진 알바 새끼가 아닐 수 있 는지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사장님은 이제 그만 울라 하셨다. 그리고 당시 군 입대를 앞둔 20살 대학생이던 나에게 이런 주옥같은 말을 하셨다. “어른들이 왜 공부해서 성공하라고 하는지 알겠지? 공부해서 높은 자리 올라가면 오늘 네가 당 한 이런 일 안당하고 살 수 있어. 그러니까 나중에 군대 갔다 와서 대학교 복학하면 공부 열심히 해. 알겠지?” 위로였을까. 위로였다. 군대를 가기 전에 잠시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 싶어 하고 있는 주유소 알바 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서울에서 대학교를 한 학기 다니고 군대를 가 기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었을 뿐이고 용돈도 벌고 경험도 될 것이라 생각했 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장님의 저 말에 위로를 부끄럽게도 받았다. 공부를 해 서 성공을 하리라. 그래서 건방진 알바 새끼로 살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감정노동 따위의 말은 없던 시절이다. 2004년, 시급 2700원. 한 시간 2700 원어치 일을 하면 짬뽕 4000원짜리도 사먹을 수 없었던 시절에 ‘감정노동’이 라는 말은 주유소의 유증기와 같았다. 뭔가 매캐하고 몸에 안 좋은 느낌이 드 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의 것인지 모르겠는 어떤 것. 이런 유증기와 같이 나쁜 것들이 단지 나 혼자만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저 어떤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 ‘건방진’ 사람이 되어 있거나 ‘하찮은’ 사람이 되어 있거나 또 때 론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유증기는 나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덕분에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생 소한 단어는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유증기를 맡으면서 살고 있는 듯하다. ‘공부를 못해서’, ‘몸이 아파서’, ‘당장의 가난 때문에’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결과 로 얻은 직업에서 유증기를 맡을 이유는 없다. 당연히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 어떤 누구도 일을 하면서 뺨을 맞을 이유는 없다. 당연히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숨겨 가며, 웃어야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럴 이유는 없다. 이 이야기를 하는데 15년이 흘렀다. 15년 동안 내 왼쪽 뺨은 다행히 한 번도 다시 맞은 적은 없 고, 그건 오른쪽 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누군가를 반드시 때려야만 그 사람이 아픈 것은 아니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들은 많았다. 그래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내 자신이 강해져서도, 결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기 때문 도 아니다. 내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감정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업무의 질과 양에 무관한 감정들을 덧씌워야만 했던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감정노동자들의 잘못이 아닌, 감정노동자들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 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5년 동안 나는,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나는 건방진 알바 새끼가 아니었다. 나는 건방지지도 않고, 알바 새끼도 아닌, 주유소 주유원 이었다. 무엇보다 당연히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였고, 존재이고, 존 재일 것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과거의 나에게, 현재의 나에게,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과거의 우리에게, 현재의 우리에게, 미래의 우리에게도 마음 깊이 두 손 잡으며, “다시는 울지 말자.”고 도 말해주고 싶다.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21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기부문 입선
“감정의 완물치지(玩物致知)”류호진 늦깎이 신규교사로 임용되어 고등학교 남자반의 담임을 맡았습니다.그리고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첫째, 학교는 전문적 지식의 전수보다 기본적인 생활지도가 더 중요했다는 것.둘째, 학생들은 일과 이후에는 교실을 나서지만,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상담이 있었습니다.바로 학부모님들이었습니다. 학부모님을 상대하며 겪은 에피소드와 그 성장기입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을까, 돌 지난 아기를 재우고 거실 소파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데, 드르륵-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스승의 날에 생각나 연락드려요.」 작년 반장어머니다. 작년- 그 치열했던 기억. 문득 이 봄날, 기억을 걷는다. 임용시험에 몇 차례 고비를 마시고, 늦깎이 신규교사로 임용되어 고등학교 남자반의 담임을 맡 았다. 그리고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학교는 전문적 지식의 전수보다 기본적인 생활지도가 더 중요했다는 것. 둘째, 대입에는 정말 수십수백 가지의 복잡한 전형들이 있다는 것. 그저 수능만 바라보고 대학교에 입학했던 나의 세대와는 달리, 지금 고등학생들은 학생부 종합전형, 논술·적성고사 등 다양한 입시의 수를 계산해야했고, 이 중요한 때의 담임교사로서 나는 낮에는 쉴 틈 없는 상담과 자기소개서를 첨삭해주어야 했고 퇴근 후에도 각종 대입 연수를 찾아 다니며 공부를 해야 했다. 비록 워라벨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N수 끝에 교사의 꿈을 이룬 만 큼 네모난 교실 속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기에, 배우고 가르치며 나는 교학상장을 느꼈다. 특히 나를 바라보고 수많은 학생들이 나로 인해 동요되지 않게 하기 위해 교실에서만큼은 슬 프거나 우울함 등 부정적인 내 감정을 절제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매우 중요한 것을 간과 했다는 것에 때늦은 각인이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일과 이후에는 교실을 나서지만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상담이 있었다. 바로 학부모님들이었다. 학생들과 상담하고, 자세한 결과를 알 려주어도 밤늦은 학원 등에 부모님과 소통이 단절된 학생들이 많았기에, 부모님들은 자녀의 학 교생활을 상당히 궁금해하셨고, 그로 인해 퇴근 이후에도 학부모님들의 연락은 끊임이 없었다. 밥을 먹다가도, 아기와 키즈카페에서 놀다가도 걸려오는 상담 전화와 문자에 난 여유의 흐름을 끊겨야 했다. 그래도 학부모님이 미안하지 않게끔 최대한 밝게 감정을 숨 기며 응대했다. 하루는 담임교사들끼리 모여 회식을 하던 중, 요즘 학부모님들의 퇴근 후 연락이 너무 잦다는 공통적인 불만이 나왔다. 그 자리에 계 시던 연로한 부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사는 사실 서비스직이라네. 슬픈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 도 그걸 숨겨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게 바로 참교사야.” 우리는 선배의 말씀을 아로새기며, 잠시나마 현실을 탓했던 나태함을 성찰했다. 그렇게 주야를 불문한 상담과 첨삭이 이루어진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에는 교사는 분명 신나게 놀겠지- 라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어이없을 정도로 연이은 보충수업 및 방학 중 자율학습 감독, 그리고 2학기 수시모집을 앞둔 입시상담으로 방학임에도 매일 출근해야만 했다. 그리고 한 주간의 휴가를 신청하였다. 그동안의 피로를 보상받고자 와이프와 어린 아기, 이렇 게 우리 가족 셋이 동남아 휴양지로 여행을 떠났다. 수영장을 바라보며 망고주스를 마시며 전원 이 꺼진 휴대폰의 여백의 미를 만끽하고 꿈같은 한주가 흘렀다. 시간은 어찌나 빠른지, 다시 TV 속 드라마에서 벗어나 현실로 회귀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핸 드폰을 키니 드르릉- 드르릉- 끊임없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토해냈다. 공항버스 속에서도 밀려있는 수많은 상담과 휴대폰 작은 화면 속 자소서 첨삭들을 해주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암만 피곤해도 이대로 자기엔 여행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내가 하는 유일한 SNS인 페이스북에 가족여행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 밤, 반장 어머니의 카톡이 왔다. 「선생님, ○○맘이에요.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학생들이 지금 대입 때문에 방학 때 쉬지도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이 SNS에 휴가 사진을 올린다면 학생들이 사기가 꺾이지 않을 까요? 오지랖이라 여기실수는 있지만,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삭제 부탁드립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위와 같은 메시지가 왔다. 그래, 학부모님 입장에서 그럴 수 있지- 황급히 올린 글을 삭제하는데 문득, 아니 어떻게 내가 페이스북에 글 올린걸 어떻게 알았지? 순간 감정 이 불쾌해졌다. 내가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것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내 친구들만 볼 수 있게 올린 사진인데- 그리고 불건전한 것도 아닌 휴양지에서 먹은 음식을 올린 것뿐인데- 아 마도 나와 페이스북 친구인 우리 반 아이의 계정을 통해 보신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삭제하라는 것까진... 카톡의 내용은 손을 붙잡듯 내 심장을 부여잡았다. 답답했 지만 난 지우지 않기로 했다. 수험생들의 담임교사는 즐거움이란 감정을 표출하면 안 되는 걸까, 이것은 사생활 침해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개학날이었다. 개학식을 하고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 로 왔는데 내 자리로 인터폰이 왔다. 교감 선생님이시다. 무슨 일일까. “류호진 선생님, 잠깐 뵐까요?” 본부교무실로 찾아간 내게 교감 선생님이 느릿느릿 말씀하셨다. “류 선생님, 학부모님한테 민원이 왔어요. 아무리 개인 SNS라도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는 글을 자제해달라고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난 해명을 해야 했다. “아니 교감 선생님, 저는 그런 의도로 한 게 아니라-” “류호진 선생님, 물론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학교평가 기간이에요. 그 글은 내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교감 선생님 단호한 말씀에 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우겠다는 마지못한 답변을 드리고 피 곤하다 못해 지릿한 몸을 이끌고 교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교직에 대한 회의감 이 들었다. 내가 뭐하는 거지, 내 개인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 이렇게 난 가면을 쓰고 살 아야만 하는가? 갑자기 뭔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쾅쿵쾅쿵쾅쿵쾅쿵쾅쿵쾅’ 대체 이 주기적은 파열음은 뭘까. 귀를 기울이는데, 그것은 바로 내 심장소리였다. 심장소리가 귀에 선명해질 정도로 크게 들려오고,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가빠져왔다. 바닥을 뚫고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빈혈기가 내 전신을 휘돌았다. 옆 반 담임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류선생, 안색이 창백한데, 괜찮아?” 어느 순간부턴 의식하지 않고는 숨조차 내쉴 수 없었고, 바로잡으려 할수록 내 몸의 자율신경 은 갈피를 잃었다. 교무실은 한바탕 난리가 났고, 때 아닌 평일 낮에 구급차를 타곤 응급실로 향 했다. 다채로운 검사를 받고 한참을 자고 일어났을까, 내 손을 잡고 기도하는 아내가 보였다. 그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류호진씨, 이제 좀 괜찮으세요?” “의사 선생님, 저 어떻게 된 건가요, 큰일인가요?” “큰일은 무슨- 다 정상이에요. 그나저나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요?” “스트레스라기 보단 일하고 애보느라..” “그쪽 같이 젊은 사람들도 요즘 과호흡 때문에 병원 많이 와요, 이건 병이 아냐, 굳이 말하자면 마음이 꽉 막혀 나는 질환이지. 어서 빨리 뚫어야해요.” 퇴원 후, 집에 돌아와 응급실에서 병간호하느라 지쳐 잠든 아내와 아기를 보니 문득 수만 모금 서글퍼졌다. 어쩌다 내 삶이 이리도 여윈 걸까. 담임교사로서의 책무, 그간 나도 모르게 지쳐왔 던 것일까.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바 꿀 차례다. 그동안 수동적인 답변을 해왔다면, 이제는 능동적인 교사가 돼야 한다. 이대로 가면 난 주 42시간 근무는커녕 학부모님에 대한 스트레스에 호흡조차 보장을 못할 듯 했다. 선배교사 에게 자문,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딩동 하고 휴대폰에 알림이 도착했다. 어 린이집에 간 아기의 하루를 알려주는 알림장이었다. ‘그래 이거다..!’ 학부모님들이 퇴근 후에도, 방학 중에도, 나를 찾고 우려하는 이유는 바로 적극적인 소통의 부 재라 생각했다. 난 그동안 학부모님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 답변에만 응하는 자동응답기같 은 교사였던 것이다. 학부모님 및 학생들을 위해 학급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몸은 어른 같지만, 마음은 아이 같은 고 등학교 남학생들의 근황 및 활동사진을 매일매일 올리기로 했다. 유용한 면접 자료 등은 묻기 전 에 공지를 하고,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네이버 밴드와 단체 채팅방도 오픈. 그리고 내가 먼저 물었다. 「자제분들은 오늘 이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답니다, 부모님들은 어떠셨어요?」 그러기를 한 달이 지났다. 이젠 신기하리만큼 개인적인 연락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쓴 게 시글에 학부모님들의 답글을 보는 재미에 글 올릴 때 유쾌하게 설레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하루의 감정을 글을 통해 표현하고, 중요한 입시정보 등을 담은 글을 올리다보니, 내게 휴 가사진을 지워달라던 그 어머님도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방법은 다를지언정 자제분을 사랑하 는 마음은 나와 같으니 말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란 말이 있다. 세상 속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기의 논리를 확고하게 한 다는 뜻이며, 내 감정을 숨긴 채 입시를 공부하고 학부모님들에게 수동적 답변을 하던 기존의 태 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감정노동자로서의 교사, 학부모님들과의 소통창구 로서의 교사란 입장을 한 단계 더 나아가, 행동을 통해 가치를 완성한다는 뜻인 ‘완물치지(玩物致 知)’에 이를 차례였다. 과호흡이라는 절벽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역 설적인 깨달음에 감사하며, 상대의 감정을 알고 먼저 손을 내밀어, 내 감정 역시 보여주는 능동 적인 교사가 된다면 ‘완물치지(玩物致知)’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21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기부문 입선
"나는 보육교사다" 김현지 보육교사 생활을 하며 느꼈던 일들과 사례들을 이야기하며아이들, 학부모를 상대하며 느껴야 하 는 감정들과 보육교사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임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나는 보육교사를 한 지 20년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원교사로 6년간을 일하다 어린이집 에서 근무한지 20년이 되어 나의 교사 경력은 총 26년이다. 어린이집에서 20년 동안 근무한 나는 한 직장에서 옮기지 않고 지금도 일하고 있다. 아가씨일 때 근무를 시작하여 지금은 고1, 중2를 둔 엄마이기도 하다. 남들은 나의 경력을 듣고 이젠 수월하게 일을 하겠다고들 한다. 하지만 교사 경력이 26년인 나 는 아직도 보육교사 일이 만만치가 않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여 즐겁고 보람된 일 이 많기도 하지만 어떨 땐 내가 이일을 하는 게 맞나?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었다. 해가 가면 갈수록 해야 할 일은 더 늘어나고 엄마들은 요구하는 것이 더 많아졌으며 감당이 되 지 않는 아이들은 더 많이 늘어만 가는 듯하다. 나 혼자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보육교사 들이 경험하고 느껴 현장을 떠나 이곳을 뒤도 돌아보지 않는 교사도 많으며 그래서인지 이직률 이 다른 직장에 비해 높기도 하다.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라 쉽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누군가가 일을 저질러도 내가 대하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나의 감정을 쏙 뺀 채 웃는 얼굴로 대해야 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예의 없는 학부모님들의 무리한 요구에 울그락푸르락 얼굴이 붉혀지고 가끔 눈물을 보이는 날이 있어도 우 리 아이들에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쓸 때도 많았다. 20년 동안의 어린이집 생활을 하며 별의별 사건들도 겪고 말도 안 되는 아이들과 학부모를 만 나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 기억나는 몇 가지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몇 해 전 우리 원 만2세 반에 갑자기 이사를 간 영아가 있어 12월 초 새 영아가 오게 된 일이 있 었다. 12월이면 웬만한 영아들이 자신의 의사표현은 하나, 새로 온 영아는 자신의 의사표현이 잘 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는 영아라 교사가 좀 더 유의해서 봐야할 상황이었다. 2주 정도는 적응기간으로 영아들이 많은 시간을 원에서 보내지 않고 짧게 인사하고 헤어지기, 친구들과 얼굴익히기, 오전 간식 먹고 귀가하기 등 적응 계획대로 적응 기간을 갖는다. 영아는 생각보다 잘 지냈으며 등원할 때도 아침에 기분 좋게 와 어린이집 현관문이 열리면 할 머니와 인사도 안하고 들어오려고도 했다. 담당 선생님이 아이와 지낸 일들을 이야기 하며 잘 지내고 있는가 했는데 다닌지 3~4일이 되 었을까? 담당 선생님께서 보낸 아이의 일과사진을 보고 할머니가 노발대발하며 전화를 하셨다. 사진은 아이가 두 손을 살짝 들고 있던 사진이었다. 마침 그날 담임교사가 “○○는 사진 찍기도 힘들어요. 이름을 불러도 눈 마주침이 안 되고 워낙 아이가 교실을 돌아다녀 다 흔들린 사진밖에 없어요. 그나마 오늘은 놀이하다 만세하는 사진이 찍혀 그거 보낼 수 있었네요.”라고 말하는 것 을 들었는데 할머니는 그 사진을 보고 벌을 받는 모습이 아니냐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시더니 아 이가 요 며칠간 이상한 행동을 했다며 구석에 가서 울거나 의기소침해 있거나 이유 없이 떼쓰고 울었는데 선생님이 애 벌을 줘서 그러는 거 아니냐며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더니 결국 경 찰서에 아동학대 신고를 하여 담당형사가 CCTV까지 열람하는 일까지 생겼다. 결국 CCTV 열람 후 무혐의로 되었지만 할머니의 억지 주장과 과대망상에 우리 교사들은 내가 겪은 일인 양 쓸쓸히 그 해 12월을 마감하였다. 그 아이는 너무 과한 과잉보호에 기본생활은 물 론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는 것이 없던 아이였으며 언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의사소통 또한 되 지 않았던 영아였다. 고작 3~4일 잠깐 다녀간 아이에게 교사가 무얼 했다고 하는 건지 황당한 할머니의 주장에 그 교사는 12월 한 달을 울며 보냈으나 맡은 그 반 아이들에겐 어떻게 대했을지 남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그 아이일 뿐 다른 아이들에게 평상시처럼 대해야 하는 게 보육교사들의 현실인 것 이다. 아이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님들은 교사가 안 좋은 일로 표정이 조금만 굳어 있 거나 교사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지 않으면 득달같이 원장님께 교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거나 교사의 태도에 대해 건의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며 교사에게 행복한 일이 늘 있을 순 없다. 10여 년 전 폐암으로 아프셨던 아빠가 항암치료를 받고 계셨지만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셨으며 입원하신지 10여 일만에 하늘나 라에 가시게 되었다. 때는 2009년도 2월, 2008학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기였으며 1년 중 가장 크다는 졸업식과 학예발표회가 있던 달이었다. 아빠는 어린이집 발표회 6일을 앞두고 하늘나라 에 가셨던 것이다. 원장님은 큰 행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워낙 큰일이므로 대체교사를 써서 편히 장례식을 치르게 해 주셨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치고 바로 예정대로 잡힌 행사를 토요일에 하게 되었다. 슬픔을 진정하지도 못한 체 결국 행사를 치렀으며 행사하는 내내 아이들의 신나는 율동 과 학부모님들의 귀한 추억을 위해 티 내지 않고 시간을 버텼었다. 눈과 입은 웃고 있었으나 나의 가슴은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지는 듯했다. 행사가 잘 마쳐졌 다고 생각하니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살짝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상을 당한 것을 알고 있던 학부모가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쉽지 않은 상황인데도 행사를 위해 애쓴 나를 위로해 주시는 학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생 겼지만 한 편으론 사랑하는 아빠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 도 들었다. 몇 해 전 함께 일하던 교사도 갑작스럽게 남편이 사고를 당해 장례를 치른 일이 있었으나 마 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일주일 만에 출근하여 아이들을 대하며 다시 수업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아이들과 학부모님께 늘 미소로, 목소리는 경쾌한 솔톤으 로 대하기가 과연 쉬웠을까?? 사람을 상대하면서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란 쉽지 않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보육교사들을 응원하고 싶다. 가정에 있으면서 애 보기 힘들어 어린이집으로 내모는 엄마들이 허 다하고 아침도 먹이지 않고 얼굴도 씻기지 않은 채 또한 밤새 찼던 기저귀조차 갈지 않고 등원시 키며 너무도 당당하게 “세수 안 했어요. 얼굴 씻겨주고 로션도 발라주세요.”하며 당당하게 말하 는 일부의 학부모님을 상대하면서도 “스마일~”하며 웃음을 보여야 하는 보육교사를 응원한다. 부모도 자격이 있어야 아이를 낳고 양육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의 교육을 받았으면 한다. 보육 교사에게 해마다 교육시키는 아동학대예방교육 또한 부모도 똑같이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교육 을 받아 잘못된 양육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길 바란다. 이제는 부모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아이를 키운다고 하면서 부모에게는 기 본적인 교육조차 하지 않고 그저 보육교사를 애 보는 사람으로만 취급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으 면 한다. 열거하지 않은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결론은 보육교사도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는 감정노동자라는 것이다. 어떤 교사는 누군가 의 소중한 딸이며 누군가의 따뜻한 엄마이며 누군가의 사랑스런 동생이거나 누군가의 친절한 이 모, 고모일 수도 있음을 알고 의심부터 하지 않고 교사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21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기부문 입선
“얼룩” 김시영 백화점 판매직으로 10년 이상을 근무하였습니다.감정노동의 시련과 아픔을 겪었고 아직도 많은 감정노동자가 그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직접 겪었던 감정노동 수기로 감정노동자들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두가 고민하고 깨닫는 성숙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써 내려간 글입니다. 하루 12시간의 노동. 족히 세 시간은 걸리던 통근시간. 다리가 퉁퉁 부어 몸을 펴고 잠들 수조 차 없어 모로 누워 잠을 청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급작스레 돌아가시고 가장 아닌 가장이 된 형편. 겨우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어리고 가난했던 내가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구인광고를 뒤지고 뒤져 가족들을 위해 조금이라 도 많은 월급을 준다는 백화점 판매직에 뛰어 들었다. 편찮으신 어머님과 어린 두 동생과 살아 가고 아니 살아내기 위해 선택했던 백화점이란 직장은 매일 다른 얼굴로 나를 멍들이고 있었다. 몸은 항상 무거웠고 생활은 버거웠다. 건강했던 체력과 장녀로서의 책임감으로 아등바등 버텨 내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눈과 누군가의 입은 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무너지게 만들었다. 아래위로 나를 훑으며 조롱하듯 보내던 시선. “내가 여기 백화점에서 한 달에 얼마를 쓰는 줄이나 알아?”“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백화점에서 일이나 하고 있지!” 인격적 대우는커녕 폭력에 가깝던 고객들의 말투. 거기에 그를 넘어선 성희롱적 발언도 심심찮은 일이었다. 도심의 중심에 휘황찬란하게 우뚝 서 있던 백화점. 그 속에서 화려한 화장품을 화사한 옷을 판매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나처럼 그런 일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자존심보단 매출을 지켜야 했고 눈물을 흘릴 겨를도 없이 매무새를 가다듬고 억지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다 그런 거야! 백화점 다니면서 나도 이 욕 저욕. 안 들어 본 적 없어. 내 잘못과는 상관없이 고객 들은 자신의 기분대로 우리를 막 대하지. 나중엔 웬만한 일 아니면 상처도 받지 않게 된다니까.” “그래! 우리는 자기들 맘대로 무시해도 되는 존재인거지. 어떨 땐 고객의 강아지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이라니까. 어떤 손님은 우리가 가난해서 백화점에 다니는 거 자체가 잘못이라더라!” 동료들과 선배들의 하소연은 서러웠지만 나또한 겪고 있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들에게 위로란 건 남들보다 수 시간은 늦던 퇴근 시간 후. 울며 분노하며 삼키는 쓰디 쓴 소 주 한잔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한잔 술에 취해야만 잠들 수 있던 날도 부지기 수였다. 연유도 없이 쏟아지던 어이없는 욕설과 갖은 짜증에 지쳐 유니폼을 벗고 백화점을 뛰어 나가버 릴까. 끝없이 낭떠러지로 추락하던 자존감에 가슴이 찢겨 출근하지 말아버릴까. 고민과 갈등은 거칠게 나를 잡아 흔들었지만 매일 밤 큰 딸아이의 다리를 주물러 주시며 몰래 눈물을 훔치시던 엄마와 고작 초등학생이던 두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참자! 참고 참다보면 오늘도 어찌어찌 지나가겠지.’ 그날도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여느 날과 별반 다르지 않던 날이었다. 주말이라 바쁜 편이었지만 고객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했고 구내식당에서 늘 비슷했던 메뉴의 점심을 먹었다. 휴게실에서 아픈 다리를 주물러 가며 조금 쉬다 그리 다시 매장 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성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고 갑자기 누군가 내게 달려와 무엇을 던졌다. “야! 너지! 이 따위 쓰레기를 판거 너지! 얼굴 보니 딱 알겠네. 뭣 같이 생겨 가지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 얼굴에 던져진 것은 다름 아닌 여성용 속옷이었다. 고객은 더 큰 소리와 더 험악한 말투를 쓰며 나를 채근했고 나는 금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주변 매장 직원들은 물론 수많은 손 님들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고객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쥐구멍이라도 있 다면 숨고 싶었다. “그러니까! 애가 나한테 이딴 걸 팔았다니까. 저기 내가 가져온 속옷 보이지? 속옷까지 파랗게 변한 거 안 보여?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내 속옷까지 가지고 왔겠어? 이런 거지같은 걸 팔면 어떡해! 그것도 이런 백화점에서?” 한 달 전에 구입했다는 옷. 영수증도 없고 교환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나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옷의 이염이 심해 자신의 값비싼 속옷까지 버렸다며 고객은 물질적, 정신적 보상금을 요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전에 그 옷을 판매한 나의 잘못을 빌라고 말해왔다. 이미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수차례나 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다시 한참을 90도로 깍듯이 고개 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해야 했다. 사과와는 상관없이 다시 이어지던 모진 말들.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온 몸이 벌벌 떨려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리는 것 외엔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속옷에 이어 쇼핑백과 핸드백까지 던지던 고객은 매니저님과 백화점 직원분의 설득으로 조금 씩 안정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마치 죄를 지은 죄인처럼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머리 를 조아리고 있었다. 절대 원치 않던 눈물이 갑자기 뚝. 뚝 떨어졌다. “뭘 잘 했다고 울기까지 해? 참 가지가지 한다! 백화점에선 저딴 애들 교육 안 시키고 뭐하는 지! 짜증이 나서 죽겠네.” 그때였다. “아주머니! 여기 일하는 직원이 만든 옷도 아닌데. 왜 이 아가씨에게 화를 내요? 가만 보니까 아 주머니 딸뻘쯤 되겠는데 아주머니 딸이 어디 나가서 이런 대접 받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옷의 얼룩은 지우던가 아주머니 말대로 보상받으면 되겠지만, 이 아가씨 마음에 난 얼룩은 어쩔 건데 요. 아주머니가 보상해 주실 수 있겠어요?” 화를 내던 고객은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며 삿대질까지 시작했지만 나의 입장을 대변해 주시던 고객은 내게만 살짝 미소 지어 주신 후 자리를 떠나셨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우느라 잠들지 못했고 결국 며칠을 앓아누웠다. 보상 문제로 인해 우리 매장 의 매니저님과 나는 몇 번정도 불러 다녀야 했고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내 얼굴에 던져진 속 옷과 내 가슴에 꽂힌 비수 같은 말들은 나의 명치를 쿡쿡. 쑤셔대고는 했다. 모멸감과 자괴감까지 느껴야 했던 그날의 일은 지나가던 고객의 말씀처럼 퍽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내 가슴에 얼룩으로 남겨져 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이제 더 이상은 백화점 판매원이 아닌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있 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 시절의 나와 같은 감정노동자들을 마주 한다. 어느 마트의 계산대 앞에서 귀를 타고 전해 오는 수화음 안에서 푸짐한 음식이 즐비한 식당 속에서 또 곳곳에서 내게 친절히 말 걸어 주며 내 아이들에게 환한 미소를 건네어 주는 수많은 그들을 만난다. 그리고 부러 곱씹어 본다. 고작 내 기분에 따라 혹은 교환할 수 있는 물건들 때문에 그들의 마 음속에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남긴 일은 없었는지를. 우리에게 과연 더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를.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내민 따스한 말 한마디와 작은 미소가 가져올 아름다운 변화에 대하여.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21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기부문 입선
“감동노동자가 되는 그 날을 꿈꾸며...”김경진 콜센터에서 15년간 상담사와 관리자로 일을 하며 겪었던 수많은 일 중에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며감정노동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러한 감정노동이결국 한 개인 이 감정노동을 감동노동으로 변화시킬 사회적 기업가를꿈꿀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음에 대 해 작성하였습니다. “나 좀 안아줘”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늘 남편에게 하는 나의 첫마디.남편 품에 안겨서 하루 종일 어떤 민원 고객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는지 쫑알쫑알 푸념에 가까운 신세한탄을 하고 나야 내 마음에 눌려있던 큰 돌덩어리 하나가 살짝 내려진다.보험사 콜센터에서 상담사를 거쳐 슈퍼바이저까지 상담일을 한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언 제나 늘 새롭고 다양한 민원 고객들이 매일 나를 기다리고 이 감정노동에는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특히, 그 날은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대박인 날이었다. 한창 바쁜 점심시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전화를 받는 직원들의 후처리 업무를 도와주고 여 기저기서 날아오는 메모문의에 답변하느라 정신없이 바쁜데 상담직원 한명이 울면서 달려온다. 50대 남자고객인데 해지환급금을 문의하신다고 해서 정보 확인을 시도했지만 본인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금액을 알려 달라 화를 내고 상급자를 바꾸라고 했단다. 우선 직원을 진 정시키고 전화를 이어받아 차분하게 고객과의 통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객의 반응은 냉담하다. 아니 싸늘하다. 악성고객의 필이 느껴진다...“아니, 내 개인정보는 니네들 말처럼 소중하니까 말해줄 수 없어. 내 번호 찍히지? 나 맞으니까 그냥 해약환급금 알려줘.”상급자가 통화를 하더라도 최소한의 정보 확인을 한 후 안내가 가능함을 거듭 말씀드렸지만 이 미 고객은 본인의 말씀을 거역한 콜센터 상담직원에게 화가 날 대로 화가나 더 이상 들리지 않 는 것 같다.그러더니 갑자기 “니가 니 개인정보 말해주면 나도 내 개인정보 말해줄게.” 나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답하고 그렇게라도 빨리 이 고객과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넌 이름이 뭐냐? 넌 몇살이냐?” 묻기에 이정도야 일반고객들도 가끔 물어보시니 바로바로 대 답해 드렸다.그랬더니 “넌 결혼은 했냐? 넌 애는 있냐?”응? 뭐지? 하는 기분은 들었지만 결혼은 했고 아이도 있다 대답했다.그러자 고객이 갑자기 툭 던진 한마디... “너 남편이랑 한 달에 몇 번하냐? 잘하냐? 그것도 대답해봐.” 아마 내 개인정보라며 대답 안 해줄 것이라 예상하고 질문을 던졌는데 너무 따박따박 대답을 올곧게 한 내 탓인가? 그래서 너무 얄미워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성희롱 발언을 생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불특정 여성에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던진단 말인가. 순간 온몸이 얼어붙고 머리가 하얗고 말문이 막혔다.전화기 속에 갇힌... 친절해야만 하는 콜센터 상담사. 24살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사원서를 낼 때 콜센터가 사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전혀 모르고 그냥 지원서를 냈다. 덜컥 합격을 하고 보험교육을 받으며 콜센터가 전화로 고객응대를 하는 곳 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살짝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보험공부 가 참 재미있어서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출근하고 맞닥드린 상황을 헤쳐 나가 기 급급했다. 하지만 1년, 2년 경력이 쌓이면서 전화응대도 익숙해지고 업무도 숙달되어 가면서 일이 점점 재밌어졌다. 콜센터 상담사의 이직률은 굉장히 높고 이직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강도 높은 일이다. 고객들 은 콜센터 상담사면 일단 무시하고 보는 것 같다. “그냥 앉아서 전화 받는데 뭐가 힘드냐.”, “너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했지?” 하는 등의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나도 일해보기 전에는 아무나 다 하는 그런 쉬운 직업인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이 ‘고객상담’ 이라는 직업은 정말 하늘 이 내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과 귀와 손과 머리가 한 번에 동시에 움직이고 상호협조가 되어야한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 면서-그것도 매우 친절하게 존칭과 상황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면서-고객이 원하는 업무를 3~4 분 내에 정확히 파악하고 전산을 조작하고 금액을 입력하고 하는 등의 행위를 한꺼번에 해야 한 다는 것이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정확한 업무처리도 중요하지만 콜센터 상담직 원들이 회사와 상사에게 가장 많이 요구 받는 것이 ‘친절’이다. ‘사물존대’ 라는 신생단어가 생길 정도로 고객의 물건에까지 존칭을 사용하고 예쁜 목소리로 ‘솔’톤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 띤 음성과 친절한 말투를 사용해야 한 다. 미소 띤 음성은 진짜 미소를 지어야지만 들리지 무표정에서는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콜센터 상담사들은 입사와 동시에 책상 앞에 작은 손거울 하나가 놓여진다. 모니터를 보면서 본인이 미 소 띤 음성으로 고객을 응대하는지 스스로를 감시하며 일하라는 의미이다. ‘미소’를 머금은 음성과 친절한 말투는 고객에게 해야 할 상담사의 첫 번째 의무이다. 하지만 166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고객은 본인에게 향하는 상담사의 미소 띤 음성과 친절 한 말투가 고마운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 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불친절’하 다며 민원을 제기하거나 언짢아한다. 또 반대로 고객의 상황이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 해 클레임을 제기하는 경우라면 상담사의 미소와 친절 이 그들에게는 놀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담사는 그 상황에서 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회사에서 정한 매뉴얼 이외의 범위를 벗어나 고객을 응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객들이 “너희는 앵무 새니? 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그러니?” 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의 감정노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친절한 말투와 미소가 감정노동 직원들 의 무기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고객의 불만에 대안을 제시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가이 드라인과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그 범위와 권한은 회사가 직원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직원이 고객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대 로 당하고 결국 상급자에게 전달되면 결국 고객이 원하는 대로 일이 해결이 된다. 처음 교육을 받을 때 고객에게는 절대 “안 됩니다.”, “불가합니다.” 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 대신 “어렵습니다.”라고 해야 한단다. 그런데 고객은 “어렵습니다.”라고 하면 “그래서 된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거예요?”라고 반문하며 상담사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절대 안 되는 거면 ‘어렵다’가 아니라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직원에게 교육을 해야 하고 어차피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라면 직원과 고객이 실갱이 할 필요 없이 직원 선에서 가이드라인 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을 부여해 줘야 한다. 안내를 할 때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고객이 오해하거나 곡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된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고객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객을 위해서라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라고 정확히 말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담사들을 힘들게 하는 다른 한 가지는 녹취와 심각한 관리이다. 고객과의 분쟁상황 167 03 수기 부문 발생 시 해결을 하기 위해 녹취를 하는 목적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녹취를 듣고 메모를 통해 회사 는 상담사의 친절도를 지적하거나 업무지시를 한다. 그리고 전산의 로그인, 로그아웃, 휴식, 작 업시간체크 기능을 통해 상담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심한 곳은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체 크하고 가는 횟수를 제한하거나 가는 순서를 정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고 나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체크하고 통제하는 상황에 놓여 진다면 그것만큼 심각한 스트레스는 없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통제하기 때문에 이 역시도 감정노동이다. 감정노동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 중에 나의 감정을 억누르고 실제 내가 느끼는 감정과 다른 통제된 감정으로 노동에 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감정노동에 대한 대책 역시 회사가 가지고 있다. 고용된 직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통제는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센터를 운영하고 직 원을 관리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콜센터에서 상담하는 직원들을 공장에서 돌리는 기계나 로봇쯤으로 취급해선 안 된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를 정하고 직원과 합의된 선 에서 적절한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도 기계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그들의 감정을 대우해 줘야한다. 이것이 감정노동 줄이는 방법이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만두면 되잖아요.” 라고 말하면 사실 할 말 이 없다. 하지만 대체로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대체로 어리거나 나이가 많거나 학력이 낮거나 생계형이거나 경력이 단절되었거나 하는 등의 대체할 수 있는 직업이 매우 제한적이고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가진 경력이 상담일이여서 이곳을 나가더라도 더 나 은 환경의 콜센터에 입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라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 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의식적으로라도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정책적 16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으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처음에 언급했던 그 성희롱 고객에게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악성고객을 응대하는 매뉴 얼이 만들어져 있었고 이를 적절히 사용하도록 회사에서 마침 권고했던 상황이라 가능했다. 사 실 그전까지는 매뉴얼이 있어도 혹시나 고객에게 그런 식으로 응대했다는 상사의 불호령이 있 을까봐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참다가 울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악성고객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대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정비하고 공식화하면서 나는 든든한 백 그라운드를 믿고 친절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성희롱 고객을 물리칠 수 있었다. 매 뉴얼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라. ‘고객을 진정시키고 단호한 어조로 자제를 요청하고 녹음 이 되고 있음을 언급하여 증거를 확보하고 책임자를 호출한 후 법적 조치가 될 수 있음에 대해 구두경고를 했음에도 계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한다면 더 이상 응대가 불가함을 안내하고 상담을 종료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악성고객 응대 서비스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고객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회사 분위기와 혹시나 직원의 응대로 고객 불만이 생길까 걱정하는 관리자 때문이라 생각한다. “너 하나만 참으면 민원고객도 없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되니 그저 참아라.” 하던 말도 안 되는 감 정노동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어이없는 성희롱을 했던 그 고객도 녹음이 되고 있고 이는 법적으로 조치가 될 수 있다 는 나의 단호한 말투에 더 이상 성희롱 발언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나는 나의 감정 을 통제하고 나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으로 그 고객과의 통화는 마무리했다. 법적 조치가 된다 는 말에 겁을 먹은 건지 정보 확인을 하고 해지환급금을 안내하는 방법으로...그것 외에는 방법 이 없었으니까. 이제는 그땐 그랬지하며 웃으며 안줏거리 같은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더럽다..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하나..’하는 수치심에 모멸감이 들었다. 감정노동자이기 때문에 그 개인의 감정이 노동의 대가인 월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공공의 감정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감정은 소중하고 그 소중한 감정이 노동으로 인해 생채기가 생기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한다. 15년간 콜센터에 재직하면서 상담사, QA, 슈퍼바이저 등 많은 보직을 경험해보았고 수천여 명 의 고객을 응대했다. 그래서 그만큼 수많은 감정노동과 마주했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정신적, 육 체적 상처가 크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감정노동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참기만 하는 감정노동자가 아니라 감정노동을 바꾸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래서 나는 지금 수많은 감.정.노동자가 감.동.노동자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작은 노력을 시 작했다. 모든 노동자가 감동받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21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최우수
“아빠의 비밀”고철민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우수
“그냥 한마디...”손정기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장려
“작은 배려가 배여있는 우리 삶”송유진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장려
“이상하지 않나요?”(가명)남정연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입선
“가치 있는 노동을 하는 감정 노동자입니다.”김준성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입선
“어느 알바생의 일기장”김혜빈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웹툰부문 입선
“작은, 그 한마디”정호섭 감정노동, 우리들의 이야기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품집※ 출처를 밝히지 않고 <2019 서울시 감정노동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내용을 무단전재 또는 복제하는 것을 금합니다.
2021.06.18